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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4개국』 - 스페인의 역사
    사진이야기/해외여행 2013. 7. 12. 11:06

     

    페인의 역사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교두보로 오랫동안 침략전쟁의 목표물이 되어왔다. 기원전 3000년에는 북아프리카에서 여러 부족들이 지브랄타 해협을 건너와 반도에 정착했고, 기원전 1000년 경에는 캘트족이 스페인 북부에 자리잡았으며, 거의 비슷한 시기에 페니키아와 그리스 상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뿌리를 내렸다. 기원전 2세기, 로마의 침공은 스페인 전역이 하나의 권력아래 통합되는 계기가 되었고, 서서히 로마법과 언어, 관습등이 피지배 민족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리하여 서기 74년까지 스페인 사람들은 모두 로마제국의 시민으로 간주되었다. 서기 1세기 기독교가 전해졌지만, 지배계층인 로마인들에 의해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서기 409년, 스페인의 로마 정부는 막강한 게르만군의 침략을 받아 무너지고, 419년에 이르러 비지고스 왕국이 들어선다. 이 왕국은 711년까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다가 이슬람이 지브랄타 해협을 건너 고트 왕국의 마지막 왕조인 로데릭 왕조를 쳤을 때 멸망했다.


    무어인의 스페인과 왕정복고운동


    714년까지 이슬람군이 북부 산악지대를 제외한 스페인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알 안달루스(Al Andalus)라고 부르는 무어족의 남부 스페인 점령은 거의 800년이나 계속되었다. 이시기 동안 예술과 과학은 발전했고, 새로운 곡물과 농경법이 소개되고, 궁전, 이슬람 사원, 학교, 정원과 공중 목욕탕이 세워졌다. 722년, 비지고스(Visigoth) 왕인 펠라요(Pelayo)가 북부 스페인의 코바돈가(Covadonga)에서 무어족에 대한 첫번째 반격을 가했는데, 이 전투는 기독교인들에 의한 스페인 왕정복고 운동의 첫 움직임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펠라요와 그 후계자들은 작지만 강력한 기독교 왕국을 세우고, 영토 내에서 무어족을 쫒아내는데 성공한다. 그후 9세기초까지, 영토를 계속 확장한 기독교왕국과 무어족의 이슬람왕국사이에, 바르셀로나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국경이 생겼다. 1085년 톨레도의 뒤를 이은 알퐁소 4세(Leon과 Castile의 왕)는 무어족을 물리치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알모라비즈(Almoravids)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알모라비즈는 대부분의 알 안달루스 지역을 획득하여 1144년까지 스페인을 실질적으로 지배한다. 이 권력은 다시 다른북아프리카 부족 알모아즈(Almohads)에게 넘어가 1212년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1266년까지는정통 스페인 기독교 왕조가 그라나다 주를 제외한 전 스페인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13세기말까지 카스틸(Castile)과 아르곤(Argon)은 기독교 스페인의 두 핵심파워로 부상하였고, 1469년에는 Castile의 이자벨라 공주와 Argon의 페르디난드 왕자의 결혼으로 양국이 통합된다. 카톨릭 통치권으로 된 이 나라는 스페인 전지역의 통일을 달성하여 황금시대 진입의 초석을 닦게된다. 그러나 1478년 악명높은 스페인 종교재판소를 설립하여 유태인과 비교도를 추방하고 처형하는 참극을 자행하기도 한다. 1492년 그라나다를 함락했으며, 그로부터 10년후 무어왕의 항복을 받아내어 장기간의 왕정복고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황금시대


    1492년 인도로 가는 길을 찾는 도중, 우연히 바하마(Bahamas)에 이른 콜롬부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이를 스페인 영토로 선포한다. 이 신대륙 발견이 도화선이 되어 스페인은 해외 개발과 개척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고, 신대륙을 식민화하여 부의 노획과 신대륙 고유 문명 파괴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리하여 신대륙에서 유입되는 금과 은은 3세기 동안 스페인 팽창 정책의 재정적 원천이 되었다. 황금시대는 예술분야에 있어서도 황금기를 구가하여, 그레꼬(El Greco), 벨라스케스(Diego de Velazquez)와 같은 화가나 베가(Lope de Vega)와 쎄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와 같은 작가들을 배출해냈다. 1516년 페르디난드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인 손자 챨스(Charles)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고, 1519년 챨스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어, 오스트리아, 남부독일, 네델란드, 스페인 그리고 북 아메리카 식민지에 이르는 거대 제국을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챨스와 그 후계자들은 미국으로부터 유입되는 금,은이 줄어들어 재정이 악화되고 있음에도 불구, 침략전쟁을 강행하여, 국가재정을 탕감하였다. 1588년에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의 드레이크경(Sir Francis Drake)이 이끄는 함대에 격퇴된다. 또 30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네델란드, 프랑스, 영국과도 불화가 생겨 챨스 2세가 왕위에 등극했을 즈음 이미 스페인은 빚더미에 내밀려 쇠퇴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18-9세기


    챨스 2세가 후계자없이 운명함으로서 합스부르크 왕조는 막을 내렸고, 스페인 왕위를 둘러싸고 전쟁이 계속된 끝에 프랑스 국왕 루이의 손자 필립 5세가 왕권을 장악해서 부르봉(Bourbon)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부르봉 왕조는 스페인을 통일하고 안정과 개혁을 추구하며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18세기말까지 지속되었으나, 이런 발전도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변혁과 함께 종말을 맞게되었다. 루이 16세가 1793년 단두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스페인은 신설 프랑스 공화국에 전쟁을 선포했으나 패전했다. 1808년에는 나폴레옹 군대가 포루투갈 침략의 경유지라는 구실로 스페인에 들어와서는 챨스 5세를 설득해 결국 왕위를 자신의 동생인 조셉(Joseph Bonaparte) 에게 넘겨주도록 했다. 이에 대항하여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폭동이후 스페인 국민은 하나로 단결, 그후 5년간 프랑스에 대한 독립 전쟁을 지속했다. 마침내 1815년, 웰링톤(Willington)이 이끄는 군대는 나폴레옹을 몰아내고, 페르디난드 7세를 옹립하고 왕정을 복고하기에 이른다. 페르디난드의 20년 통치는 스페인 정국을 큰 혼란 속에 빠져들게 했다. 그는 종교재판을 부활시키고 자유주의와 헌법주의 주창자들의 목을 베었고, 자유 발언을 억압했다. 스페인 경제는 후퇴일로에 놓였고, 미국은 이를 틈타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1833년 그가 죽자 그의 동생 카를로스(Don Carlos)가 이끄는 보수파와 그의 딸 이자벨라(후에 이자벨라 2세가 됨)를 옹호하는 자유파 사이에 제 1차 왕권 쟁탈전이 야기된다. 1868년에는 9월 혁명이 일어나 이자벨라 2세가 쫒겨나고 1873년 제1공화국이 선포된다. 그러나 18개월만에 군대가 이자벨라의 아들 알퐁소 12세를 왕으로 하는 왕정 복고를 단행한다. 19세기동안 스페인 경제는 이러한 정치적 격동에도 불구하고 산업혁명에 힘입어 번창했다. 그러나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은 급기야 스페인왕국의 몰락을 초래하는데, 미국이 해전에서 잇달아 스페인을 격퇴함으로서 스페인은 그간 확보해 온 식민지들을 잃게 되었다. 일단 쿠바가 독립을 선언했고,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이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


    20세기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도, 모로코에서 군부가 초래한 혼란들, 증가하는 정치적 불안과 급진파들에 의한 기초 질서 전복 시도 등 스페인을 둘러싼 소란들은 그칠 줄을 몰랐다. 1923년 내란의 위기상황에서 Miguel Primo de Rivera가 스스로를 군부 독재자로 자칭하고 나와 1930년까지 나라를 지배했고, 1931년에는 알퐁스 13세가 도망가면서 제 2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제2공화국 역시 갈등의 불씨를 끄지 못하여, 1936년 선거를 둘러싸고 다시 국론이 양분되었다. 그 한 세력은 공화국 정부와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자,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사회주의자, 시민단체, 권력이 약화된 교회세력 등, 전적인 합의에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불가피한 상황에 의해 형성된 그 지지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대, 교회, 왕족, 파시즘적 스타일의 팔란세당(Falange Party)이 연합한 보수 우익 국수주의였다. 1936년 공화국 경찰에 의한 야당 지도자 소테로(Jos Calvo Sotelo)의 암살 사건은 군대에 정부 전복의 구실을 제공했다. 뒤이어 일어난 1936-39년 내전동안,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장군이 이끄는 국수주의 세력은 나찌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로부터 거의 무제한적으로 군사, 재정 지원을 받은 한편, 선출된 공화국 정부는 러시아와 유명지식인, 예술인(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로리 리등)으로 구성된 국제조직의 심리적 지원이 고작이었다. 1939년 프랑코가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60만 이상의 스페인국민이 죽음을 당했으며, 전후에는 수천 공화당원들이 처형되고 감옥에 가거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프랑코가 권좌에 있는 35년간 스페인은 경제 봉쇠로 따돌림받고, 나토와 UN으로부터 축출되었으며, 경제 공황에 빠졌다. 그러다가 1950년에 들어서 관광 정책이 활성화되고, 미국, 로마와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는 등 국교 정상화와 외자 유치에 힘쓰기 시작하면서 경제가 서서히 회생하기 시작, 1970년대에는 유럽에서 가장 빠른 경제 성장국의 하나로 재부상하기 시작했다. 1975년, 알퐁소 13세의 손자이자 후계자, 본명 후안 카를로스(Juan Carlos), 세칭 프랑코왕이 죽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스페인은 독재 정치에서 민주 정치로의 진화를 이룩했었다. 1977년에는 첫번째 선거가 실시되었고, 1978년에는 새 헌법 초안이 마련되고, 1981년에는 복고 주의자의 쿠데타가 있었으나 실패로 끝났다. 1986년 EC(현재의 EU)에 가입했고, 1992년에 이르러 스페인은 일류국가로의 복귀를 주창하고 나서,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세빌리야 92 엑스포를 열고, 마드리드를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선포하기도 했다. 1996년 투표에서 엘튼 존의 팬이자 전 세무감시관인 호세 마리아 아즈나르(Jose Maria Aznar)가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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