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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4개국』- 포루투갈 역사
    사진이야기/해외여행 2013. 7. 15. 18:34

     

    포루투갈 역사

     

    켈트계 이베리아인 원주민은 선사시대에 이베리아 반도에 이주해 온 여러종족의 혼혈로 형성된 종족인데 BC 12세기에 페니키아인, BC 8세기에는 그리스인의 영향을 받았다. BC 2세기부터 로마의 속주(屬州)가 된 뒤 로마화가 시작되어 루시타니아라고 불렸으며,로마문화의 영향이 매우 커서 농경양식, 도시의 건설, 언어, 생활양식등 여러 면에서 지금도 로마시대의 양식이 남아 있다. 고트족 등 게르만계 부족들의 침입을 받았으며 그리스도교도 널리 전파되었다.


    8세기에는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국토의 대부분이 그들의 지배에 들어갔으나 그리스도교도에 의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과정에서 포르투갈 왕국이 성립되었다. 1095년 프랑스 왕족 앙리드 부르고뉴가 포르투갈 백작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아폰수 엔리케시가테주강 북쪽을 평정하여 카스티야로부터 독립하고 1143년 포르투갈왕(王)이 되었다.

    국토회복운동은 1249년에 완료되어 현재영역이 정해졌다. 14세기의 주앙1세(재위 1385∼1433) 때부터 왕권은 리스본의 상인계급과 결탁, 절대주의화하였으며 영국과의 동맹이 시작되었다. 주앙 1세의 아들 엔리케는 항해왕(航海王)이라고도 불렸으며, 아프리카 서해안을 비롯한 신항로의 발견에 노력하여 곧 인도항로와 브라질을 발견(1500)함으로써 포르투갈은 해양왕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은 사금과 노예의 획득, 향료를 비롯한 몇 가지 농산물의 수입에 주력하였으며, 수도 리스본은 각지로부터 모아오는 부(富)로써 크게 번창하였으나 부는 왕실과 귀족에게만 집중되었으며 이들의 낭비와 경제정책의 실패로 귀금속을 비롯한 부가 국외로 유출되어 국내 부르주아는 형성되지 못하였다. 포르투갈의 해외진출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무역과 함께 포교활동이 수반되었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국내에서는 반종교 개혁의 중심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이슬람·인도·고딕풍(風)이 뒤섞여 조화를 이룬 마누엘 양식이 확립되는 등 독자적 르네상스 문화가 개화하였다. 《오스 루시아다스》로 유명한 국민시인 카몽이스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였다. 1572년에 출판된 이 불후의 명작은 포르투갈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그리스의 ‘호메로스’에 비견되는 웅장한 국민적 서사시이며, 그 주제는 바스코 다 가마의 항로발견 등 포르투갈 역사를 다룬것이다.

    1578년 세바스티안왕(王)이 북아프리카 원정에서 전사한 뒤, 1580년부터 60년 동안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1640년 브라간사공(公)이 프랑스·영국과 동맹을 맺어 다시 독립을 쟁취, 브라간사공은 주앙 4세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의 경제적 종속이 점차 심화되었으며, 1703년에는 메스엔 조약에 따라 영국공예제품의 자유로운 수입이 인정되고 낮은 관세로 포르투갈산(産)포도주의 영국수출이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브라질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도 점차 네덜란드·영국의 진출에 의해 축소되어갔다.

    18세기 후반에는 퐁발이 예수회(Jesuit 會)의 해산 등 국내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그의 정책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봉건세력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실패로 끝났다. 19세기 초에는 나폴레옹 군대가 침입하여 왕실일족은 브라질로 망명하였으며, 영국·포르투갈 연합군과 프랑스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영국장군이 섭정(攝政)으로 부임, 포르투갈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으나 1820년에 에스파냐 내란에 호응하여 반영국(反英國) 입헌파(立憲派)의 혁명이 일어나 국왕이 복귀하여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다.

    1822년에는 최대의 식민지인 브라질이 독립을 선언한 뒤부터 포르투갈의 국력은 쇠퇴해 갔다. 프랑스 혁명사상과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포르투갈도 근대화를 겨냥한 여러 가지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내의 산업기반이 취약하여 중산층의 성장이 어려웠으므로, 중앙은행의 설립 등을 제외하고는 두드러진 성과가 없었으며, 반대로 19세기에는 사회적·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항쟁의 와중에서 1908년 국왕 카를로스 1세와 그의 왕자가 암살되었고 1910년 총선거 후 공화파(共和派)의 혁명이 일어나 마누엘 2세가 퇴위하고 공화제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그후에도 쿠데타가 되풀이되고 노동운동도 격화하였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군측에 가담, 참전하게 됨으로써 국력은 피폐해졌고 경제적 위기는 극도로 심화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독재정치를 유발하여 1926년에는 군부 쿠데타에 의하여 장군 코스타의 독재정권이 출현하였으나 이 정권은 경제정책의 실패로 실각하였다.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카르무나는 1928년 쿠임브라대학 교수 살라자르를 경제장관으로 기용하여 재정의 전권(全權)을 맡기고 극단적인 디플레이션 정책을 실시하여 3년 만에 경제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살라자르는 1932년 총리가 된 뒤 1933년에는 헌법을 제정하고 무솔리니를 모방하여 공화제적 조합국가(共和制的組合國家)의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강력한 권한을 집중시켰다. 살라자르는 비밀경찰을 창설하고 검열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국민연합당 이외의 정당을 인정하지 않는 등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1969년 살라자르가 신병으로 사임하고(1970년 사망),카에타노가 후임이 되었으나 국내 반체제파(反體制派)의 불만이 고조됨과 동시에 아프리카 식민지 등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세계 최후의 식민지제국’이라고 불리던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카에타노 정권의 탄압정책은 여러 차례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 속에서 1974년 4월 민주화를 목표로 군부 소장파 장교들에 의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40년 이상 계속된 독재정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쿠데타 후 대통령에 취임한 스피놀라 장군은 좌파(左派)의 압력으로 1974년 9월 사임하고 고메스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70년 안토니오 에아네스가 대통령에 당선, 1985년까지 장기집권하였으나 1986년 소아레스가 민간인 최초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7년 총선거에서 중도우파의 사회민주당이 단독으로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였고, 1991년 10월 총선거에서도 압승하였다. 1996년 사회당의 호르헤 삼파이우가대통령에 취임하였고 2001년 재선되었다. 1999년 6월의 구주회의 의원선거 결과 집권사회당이 압승하였다.



    전세계 코르크 생산량의 38%정도가 포루투갈산이며 카톨릭이 가장 강한 나라로 개신교는 1%정도 밖에 안된다. 민속음악은 화도(숙명, 운명이란 뜻)이며 유명한 술은 와인의 일종으로 알콜도수가 높은 뽀르또(항구도시 이름임)이다. 유럽에서 스페인과 함께 경제력이 약한 나라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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